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05
죽음, 장례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상 05
  • 안양준
  • 승인 2023.08.30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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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속에서

사무엘 베게트의 두 막으로 구성된 희곡은 이틀에 걸쳐 같은 장소, 같은 인물이 등장하며 거의 비슷한 대화와 동작이 반복된다. 제목이 말해주듯 주인공인 두 사람의 존재 이유는 누군가를 기다리는데 있고, 그 누군가가 바로 ‘고도’이다.

불확실성, 무한 반복, 의미 부재 등이 희곡이 담아내고자 하는 주제라고 할까? 그 속에서 스스로 절망하는 현대인의 고독을 발견할 수 있다.

1953년 파리의 바빌론 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부조리극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이 작품은 사무엘 베게트가 “이 작품에서 신을 찾으려 하지 말라”고 한 것처럼 신적 존재에 대한 소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적 존재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절망적인 삶을 그리는 염세주의를 담은 작품이다.

“때로는 내가 그 마지막 순간이 언젠가는 오겠지 하고 자신에게 이른다오. 그럴 때면 나 자신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거든. 어떻게 표현할까? 속이 후련할 게고, 동시에 등골이 오싹하겠지. 오싹할 거야. 제기랄!”

극 중에서 블라디미르가 말한 위의 내용은 개인의 종말인 죽음을 가리키는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언젠가 다가올 마지막 순간, 그것은 막연한 추측이지만 등골이 오싹한 장면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회개를 하면 어떻게 될까?” 
“무엇을 회개한다는 말인지?”
“뭐. 자세한 것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네만.”
“세상에 태어난 것을 말인가?”
(블라디미르는 웃음을 터뜨리다가 얼굴에 긴장기를 띄우고 손으로 볼두덩을 누르며 곧 웃음을 억제한다.)
~
“성경 읽었나?”
“성경이라. 아마 한 번쯤 떠들어 본 일이 있을 거야.”
“신부가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서?”
“어떤 학교였는지 생각이 안나는구만.”

“구세주 크리스마스와 함께 두 도둑이 십자가에 달렸었지. 사람들이.”
“누구 말인데.”
“구세주 그리고 두 도둑. 사람들의 얘기가 하나는 구원을 받았고 또 하나는. 저주를 받았다는군.”
“무엇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지.”
“지옥에서.”
“나 가겠어.”(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도시 이해할 수가 있어야지. 누구에게 욕했다는 건가.”
“구세주에게 말일세.”
“그건 왜?”
“구세주가 자기들을 구해주지 않는다고.”
“지옥에서?”
“아니! 그게 아니라 죽음에서 구해주지 않는다고.”

이러한 내용은 불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무지한 까닭에 불신자의 대열에 서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들도 어느 정도의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 ‘회개’에 대해서도 마음 한 편에는 두고 있고, 자라온 과정 속에 성경을 읽었던 막연한 기억도 갖고 잇다. 구세주가 구원한 도둑이 지옥에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나 구세주가 자기들을 구해주지 않았다고 욕하는 자들이 지옥에서 구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죽음에서 구해주지 않아서 욕한 것이라 고쳐 말하는 모습을 보며 지식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에 매우 접근해 있음을 보게 된다.

“아름다운 곳이로군. 아름다운 경치이거든. 떠나자구.”
“그럴 수 없어.”
“왜?”
“고도를 기다리니까.”

“그가 꼭 온다고는 안했거든.”
“오지 않는다면?”
“내일 다시 오지.”
“그리고 모레도 다시 오고.”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서 매일같이 계속해서 말이군.”
“무슨 말인지.”
“올 때까지란 말이지.”

“난 그인줄 알았다구.”
“누구 말이오?”
“고도.”
“제길, 갈대 숲에 불어온 바람이었군.”
“난 꼭 소리를 치는 줄 알았거든.”

이제 ‘고도’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물론 극 속에서 고도라는 인물이 직접 등장한 적은 없다. 하지만 고도에 대한 기다림으로 떠나지 못하는 현실은 계속 반복된다. 계속해서, 올 때까지 연속되는 기다림은 얼핏 대단한 신앙처럼 여겨질 수 있다. 또한 신적 존재를 대할 때 느낄 수 있는 ‘누미노제’의 감정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뿌엥쏭과 왓뜨만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형상을 한 하나님은 까까까까 하얀 수염을 달고 까까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성스러운 무관심, 성스러운 실어증을 가지시고 왜 그런지 모르지만 몇몇을 제외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나이다. 그는 성스러운 미란다 모양으로 어째 그러한지 분명치는 않으나 불과 고통 속에 신음하는 자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계시며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바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기둥에 불을 지르고 간간이 찾아오긴 하지만 우리가 반기는 고요, 그렇게 고요하고 오늘날까지도, 가끔 그렇게 푸른 하늘 나라에 지옥을 올려보낼 것이오. 그러나 베르느. 앙. 브레쓰의 인체측정학 아카데미가 인정을 하였지만 연구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미래를 미리 예견하지는 않겠으나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한도에서 가장 정확하게 증명된 바에 의하면 테스튀와 콘아르의 연구에 의하면 왜 그런지 잘 모르지만 화르토프와 벨쇄의 일을 위하여 뿌엥과 왓뜨만의 연구 이후 인간이란 그 반대의견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인간, 한마디로 인간은 영양의 향상과 폐물의 제거에도 불구하고 여위어가고 있는 중이며 ~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쎄느, 세에우와즈, 쎄에마른느, 마른네우즈에서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마르고 줄어들고 반복하건데 우와즈, 마른느, 한마디로 말해서 볼테르가 죽은 후 매 파이프당 완전한 손실은 노르망디에서 잘 달아 매 파이프당 평균 두손가락 백그람 정도였는데 결과적으로 어찌됐든 사실이 입증하고 있고 그리고 또 한편 가장 중요한 것에서 발췌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스타인백과 페터만의 실험에 비추어 보면…”

극 중 인물 중 하나인 럭키가 단조로운 어조로 내뱉는 대사에서 철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연구에 대해 작가의 철학적 지식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주문 외의 아무런 구속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실제 극 중에서 럭키는 목에 포승줄에 감기고 무거운 짐을 진 채 계속되는 채찍질에 학대 당하는 인물에 불과하다.

“개 한마리가 들어왔네. 멍멍이 한 마리가 들어왔네. 주방 안으로 들어와서 송아지 순대를 슬쩍했다네. 그러나 국자들고 나타난 요리장은 그 멍멍이를 두들겨 때려 죽였다네. 그걸 본 다른 멍멍이 동지들은 급히 서둘러 장사를 치러 주었다네.”

블라디미르가 극 중에서 부른 노래의 가사이다. “급히 서둘러 장사를 치러 주었다네”는 마치 후렴구처럼 여러 번 불려진다. 별 의미 없이 불려진 노래일 수 있으나 사람 역시 죽게 되면 서둘러 장사를 치러 주는 것으로 끝맺음할 수 있는 것처럼 들린다.

전체를 볼 때 자신이 처해 있는 자리는 구원의 소망이 없는 절망의 자리에 속해 있음을 분명히 밝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계속해서 이곳을 향해 SOS를 보내는 것처럼 들려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왜 그들이 계속해서 이곳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인지?

그리스도인들의 세상 읽기와 사람 읽기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 생각된다. 보이지 않고 잘 달리지 않는 저 편에서 계속해서 아우성치는 호소에 조금은 눈길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매일 반복되는 기다림과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 고도가 나타남처럼 다가갈 수 있다면 과연 그들의 반응은 어떨까 하는 나름의 상상을 하게 된다. 

그들이 갖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죽음에서 구원해 주지 않았다고 욕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구원의 카드를 손에 쥐고 있음에도 다가서지 않는다면 책임 회피의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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