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일, 한가위 추석날이 다가왔다
9월 8일, 한가위 추석날이 다가왔다
  • 김홍술
  • 승인 2015.05.02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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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술 목사와 방인성 목사의 40일 단식현장 그후...(6)

방 목사의 회갑생일 감사예배에 참석하시어 뜨거운 감동으로 마지막 축복의 기도를 두 목사의 손을 꼭 잡고 해 주시던 조화순 목사님은, 매일 아침 빠짐없이 나오셔서 유니폼으로 삼은 보라색 로만칼라 셔츠를 늘 갈아입으시고 종일 나란히 함께 해 주셨다. 사랑하는 후배 목사들이 이렇게 십자가를 지는데 같이하고 싶지만, 하루 한 끼 살이라도 해서 곁을 지켜주시겠다는 거다. 팔순이 넘으신 조 목사님은 이미 60년대부터 여성 노동자 운동과, 박정희 유신권력에 맞서 싸우다 모진 고문을 받으셨던 전설의 여 전사셨다. 원로 목사 중 유독 조 목사님만이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현장의 한 가운데 언제나 찾아 나오시는 분이시다.

나보다 며칠 앞서 단식하던 김병오 선생 역시 올해 80세의 고령임에도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단식하신다며 혼자 조용히 구석에 자리를 하고 있었다. 처음엔 누군가 했었는데 며칠 지나며 인사하다보니 예전 11대와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분이셨다. 아들이 광화문 광장 바로 옆 빌딩에서 변호사로 일하면서 퇴근길이면 매일 들렀는데,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고 만류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선생은 결국 20여일 만에 단식을 접고 돌아가시며 우리 두 목사에게 너무 미안해 하셨다. 참으로 자신을 감추시고 겸손히 당신의 자리만을 지키시는 어른을 뵈면서, ‘아 나도 저렇게 용기 있게 늙어 갈 수 있을까’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방 목사와 나는 손님들이 없는 이른 아침이나 간간의 틈나는 대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린 너무도 대조적인 환경에서 목사로 살아왔었다. 방 목사는 오랜 영국 유학생활과 현지목회를 하다가 귀국하여서도 교회개혁에 꾸준히 사역해 오면서 익히 교계에 앨리트 개혁가로 알려진 반면, 난 그저 부산에만 콕 박혀 바닥으로만 기면서 맨몸으로 노숙자와 부대껴온 3류 목사일 뿐이다. 우리 둘은 누군가 갖다 준 좁은 텐트 안에서 몸을 부비며 마음도 열고 정도 들었다. 그리고 세월호와 온 국민이 함께 우는 광화문 광장에서 평생에 운명에 없던 40일 광야 단식으로 의형제를 맺기로 했다.

방 목사와 나는 점점 기운이 많이 가라앉았다. 광장 지하에 있는 화장실에 용변과 세면을 해결하고자 오가는 걸음이 흐느적거렸다. 우린 몇 번인가 화장실 장애인 칸에 들어가 걸어 잠그고 물수건으로 몸이나 닦고 있었는데, 어떤 여성 해직교사 한분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오피스텔이 낮에 비어있으니 마음껏 이용하시라고 하였다. 서로 면식도 없는 분이었지만 자신의 사적 공간을 기꺼이 개방하시겠다는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으나, 여러모로 생각해 본 결과 순수한 마음을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야만 했다.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지인과 기장교단 감리교단 등에서 찾아와 금일봉을 내 밀면서 사우나를 이용하라고 강권하였다. 마침 그 오피스텔 부근 세종문화회관 뒤편 대중사우나 하나가 있는 걸 발견하고 이틀에 한번 아침에 나란히 다니기로 했다.

기어코 9월 8일, 한가위 추석날이 다가왔다. 대통령과 정치권은 끝내 유가족들에게 거리에서 추석을 맞이하게 했다. 단 한번이라도 만나주고 귀 기울여 답답한 사정을 들어만 주었더라면, 그리고 말이라도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하면서 집에 명절 쇠러 며칠이라도 다녀오시라고 위로 했더라면, 유가족들의 얼었던 마음이 조금이라도 녹지는 않았을까? 참 표독스러운 대통령이요 뻔뻔스러운 정치인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서양에서는 전장에서도 성탄일은 서로 총성을 멈추고 축제를 즐겼다는데, 우린 민족 최대의 명절날 보름달 같은 미덕을 내 팽개치고 뭐를 얻으려 한다는 말인가? 정말 원통하고 가슴 아픈 역사의 바닥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25년 동안 한 번도 공동 체 가족들과 떨어져 명절을 보내본 적이 없었는데 결국 못 내려갔다. 형제들은 아버지 없는 집에서도 의연히 명절 시장도 보고 합동차례상도 잘 차렸으며 모여 차례도 잘 지냈다고 카톡으로 사진을 올려줬다. 참으로 미안하기도 했고 대견스럽기도 했다. 나는 자랑스럽게 방 목사에게 사진들을 보여주며 으슥거렸지만 마음 한편은 아렸다. 대한민국 온 국민들이 고향과 가족을 찾아가건만, 갈 곳이 없는 버림받은 형제들을 어루만지지 못하고 만 것이다. 오후엔 예전 TV에서만 보았던 김영오씨가 그 차림 그 야윈 모습으로 지팡이를 의지한 채 광장을 찾아 왔다. 우리 둘이 있는 방도 들러 미안하고 고맙다고 머리 숙이신다. 저녁땐 어디선가 400인분의 음식을 잔뜩 준비해 와서 추석날의 광화문 광장을 풍성하고 외롭지 않게 위로하여 줬다. 참으로 고마운 손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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