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잘 있어. 몸조리도 잘 하구
형, 잘 있어. 몸조리도 잘 하구
  • 김홍술
  • 승인 2015.07.02 0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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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술 목사와 방인성 목사의 40일 단식현장 그후...(16)

주일 이른 아침 막 잠에서 깨어나는데 방 목사는 지난 밤 한 잠도 못 잤다며 말끝이 흐렸다. ‘한 열 번은 들락거렸을 거야. 나올 것 같은데... 감감하네.’ 하며 난감해 하는 표정이다. 오늘은 교회예배에 갈려고 어제 양복도 갖다 놓고 설교준비도 해 뒀는데, 잠 설친 건 둘째고 배변이 시원히 해결되지 않아 불편하기 짝이 없으니 이게 웬 사단인가! 간호사에게 약을 받아 먹고 기다려 봐도 소용없고 점점 강도는 죄어오고 나도 어떻게 도울 수가 없었다. ‘아아! 아이고~’하며 방 목사는 아래쪽을 손으로 잡고 다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화장실로 갔다. ‘안 되겠어. 자기, 가서 의사를 불러줘?’ 나는 바로 간호사실로 가서 어서 당직의사를 불러 응급조치를 해 달라고 고함을 내 질렀다. 이윽고 간호사 둘이 침대에다 응급처치를 할 준비를 하였고 의사를 기다리는 참인데, 화장실 내에서는 방 목사가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거의 출산하는 산모의 그것처럼 혼절이 올 것 같은 상황이 2~3분이나 되었을까? ‘으으~ 아이고 살았네. 나왔어!’ 하는 게 아닌가!

창문과 출입문을 열고 청소원들이 열심히 청소를 하였고, 방 목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샤워를 하고 웃으면서 나왔다. ‘야~ 정말 천당과 지옥을 두어 번 왔다 갔다 했어.’ ‘정말, 형은 단식하면서도 그렇고 이야기를 몸으로 쓰고 있어.’ 우리 둘은 사소한 것 같지만 일상적인 몸의 신진대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입을 모아 맞장구 쳤다. 방 목사는 아까는 정말 큰 수술이라도 해야 할 캄캄한 먹구름이었는데, 신사복으로 갈아입고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교회로 갈수 있다는 기쁨에 아이처럼 좋아했다. 40일 단식에 사람들이 주로 관심을 두지만, 세상이나 몸이나 막혀서 뚫리지 않는 통증 또한 얼마나 중요하고 심각한 것인지 알게 하는 사건이었 는지 모른다.

우리를 담당하는 백 과장과 퇴원 일정을 의논했다. 백 과장의 립 서비스적인 말인지는 몰라도 그간 노동자들이나 운동권 단식자들을 봐 왔지만, 우리 두 목사는 하느님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고 있어서 그런지 회복력이 놀랍게 빠르다면서 언제든지 퇴원해도 되겠다고 했다. 다만 아주 조심스럽게 보식은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해 준다. 퇴원 날이 정해졌다. 10월 16일 점심 죽식을 하고 서울역에서 타야할 KTX 열차표도 예매했다. 하루 전날 아침 우리는 어지러운 짐을 다시 꾸리기 시작했다. 지난번 광화문 광장 단식장을 나오기 전에 거의 짐을 정리했고, 병원에 몸만 달랑 실려 왔는데 10여일 만에 또다시 짐들이 덕지덕지 늘었다. 한 출판사 대표 김요한 목사는 장시간 보식하면서 보라고 우리 둘 각각에게 출판사에서 발간한 신학서적 100권씩이나 택배로 보내 주겠단다.

녹색병원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는다. 오줌을 누는데 약간 따끔거려 오줌검사 결과 요도염이 좀 왔다면서 약을 지어주었다. 일주일 정도 꾸준히 먹으면 괜찮을 거라 했다. 방 목사는 퇴원하면 서울 외곽에 있는 교회의 수양관으로 갈 계획이고, 나는 부산의 OK Q병원으로 가게끔 연락이 닿았다. 부산 지인들이 주선해서 정했는데 그 병원도 부산지역의 민주 통일 인권 등, 운동에 헌신하는 인사들에 특별한 의료봉사를 해 오던 병원이었다. SNS를 통해서 댓글로 내게 꼭 오라고 원장이 초청 글을 남기기도 해 참 인상이 깊었다. ‘형, 잘 자~ 마지막 밤이야.’ ‘응, 자기도~ 근데 잠이 잘 안 오네.’

16일 아침도 여전히 6시에 눈이 떠졌다. 아침식사는 흰쌀죽, 푸른배추국, 꽁치구이, 팽이버섯볶음, 간장, 단배추무침이 나왔고, 어제 김경호 목사가 가져온 백김치 남은 것도 내 놓았다. 난 어제 김 목사가 가져온 전복죽 남은 것을 아침에 먹고, 아침 죽은 점심용으로 미뤘다. 점심 때 나올 죽은 열차타고 가면서 먹을 작정이었다. 점심이 나오기 직전 지승룡 목사와 이서윤씨가 찾아왔다. 모 항공사의 스튜디어스로 있는 서윤씨는 지난번 10월 3일 40일째 날 꽃다발을 가지고 왔었는데, 오늘도 또 두 다발을 준비해 와서 하나씩 안겨준다. 여전히 단정한 용모와 환한 미소 우아한 자태가 몸에 배인 그녀는, 이제 떠난다니 너무 섭섭하다며 건강회복을 비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친구 지 목사가가 서두르자고 가방을 챙긴다. 오후 1시 30분 열차라서 이곳서 서울역까지는 여유를 두고 가야한단다. 서윤씨 차를 대기해 놓았다는 거였다. 방 목사는 오후에 가족들과 교우들이 올 것이기에 나 먼저 빠져 나가야 할 참이다.

‘형, 잘 있어. 몸조리도 잘 하구.’ 하면서 방 목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방 목사는 내 목을 꼭 감아 안고서 ‘자기도 건강 잘 회복해야 돼! 과식 조심하구!’ 하며 목이 멘다. 그때 지 목사가 ‘아, 다시다시...’ 하면서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댄다. 우린 다시 웃으면서 꼭 안으면서 등을 토닥였고 서로 놓을 줄 몰랐다. 지난 51일간을 그림자처럼 꼭 붙어 다니던 우리가 헤어지려니 지남철처럼 떨어지지가 않았다. 서윤씨의 아주 부드러운 운전에 몸을 맡기고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서울역에 이윽고 도착했다. 친구 지 목사는 예약한 열차표를 기어코 빼앗더니 좀 더 편한 비즈니스 석으로 바꾸고야 말았다. 그리고 둘이서 나를 부축해 열차 안까지 짐을 날라 주었다.

열차가 곧 출발하려고 안내방송이 나올 때 누군가 창문을 다급히 두드려서 밖을 보니 뉴스앤조이 기자 이사라씨가 손짓을 한다. 그래서 출입문으로 급히 나갔다. 이 기자는 헐떡이면서 퇴원하는 인터뷰를 하려고 병원으로 갔는데 방금 떠났다 해서 뒤좇아 달려왔단다. 젊은 기자의 열정이 너무 뜨거웠다. 광화문 단식장에서 여러 날 정들기도 했지만 자신의 하는 일에 기쁨과 소신으로 열심을 다하는 젊음이 아름다웠다.

이마의 송알송알 땀방울을 개의치 않은 채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재낀다. 나는 손을 흔들며 고맙다고 답례의 마음을 보냈다. 이윽고 ‘치~익 덜컹’ 하면서 출입문이 닫히고 열차가 미끄러지듯 천천히 움직인다. 차창으로 보니 손을 계속 흔드는 모습이 뭐라 하는 것 같은데, ‘잘 가세요. 건강하셔야 되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글을 마치면서...

글쓴이는 1956년 정읍에서 태어나 1963년부터 부산서 성장해 목사가 된 이후, 애빈교회와 사단법인 애빈회를 설립해 오늘까지 부랑인 노숙인 10여명과 가족처럼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오면서, 빈민운동 인권운동 평화통일운동에 함께해 오고 있다. 특히 예수의 신과 합일의 신비적 영성과 가난과 저항의 삶에 관심을 갖고, 자신이 걸어왔던 기독교를 넘어 새로운 지평의 통합적 종교와 세상을 꿈꾸고 있다.
누리집 http://homeless.kr 이메일 hongsulk1956@hanmail.net 손전화 010-3872-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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