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고 게으른 종?
착하고 게으른 종?
  • 이구영
  • 승인 2017.09.22 00: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태복음 25장과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그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두시고서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재림과 심판을 이야기하시었고,
그 재림과 심판에 대한 설명을 달란트의 비유나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언젠가 돌아와 결산을 할 것이니 열심히 장사를 해 보라고 맡기고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누어 주실 때 기준이 있으셨습니다.
주인 마음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 종들의 재능을 고려해서 나누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금 두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금 한 달란트가 얼마의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많은 차이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정도의 금액이면 어지간한 사업을 충분히 시작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3 억 원 이상 되는 돈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3억원, 6억원, 15억원을 주시면서 네 마음대로 사업을 해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6억원과 15억원을 받은 사람들은 그 즉시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꿈꾸어 오던 것을, 이런 날이 오면 꼭 해 보고 싶어 준비했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힘차게 출발했고 열심히 성실히 일을 해서 두 배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6억원은 12억이 되었고, 15억은 30억이 되었습니다.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 약 3억원을 받은 사람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혹시나 망할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망했다가는 원금손실로 인한 손해를 자기 혼자 감당해야 했고, 그러기에 자신의 능력은 너무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3억원을 금고에 그냥 넣어두었습니다.
은행에 맡기려고 해도 은행이 부도날 것 같았고, 사업을 하려고 해도 망할까봐 두려웠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드디어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종들과 결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열 달란트를 가져왔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은 네 달란트를 가져왔습니다.
흐뭇해하시는 주인님께서는 이들에게 아주 똑같은 칭찬을 해 주시면서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해서 즐기자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성경은 두 사람의 칭찬내용을 글자 하나도 틀리지 않게 기록합니다.
두 달란트 받은자와 다섯 달란트 받은자의 상급이 동일했습니다.
“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반면,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주인에게 금고에 넣어 두었던 한 달란트를 그대로 전해주었습니다.
장사를 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했습니다.
혹시나 망할까봐 일을 못했다고.. 주인님만큼 그렇게 잘 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두었다고..
그러자 주인은 대답했습니다.
“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
결국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그 한 달란트마저 빼앗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았던 자와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자기들이 남긴 것을 다 돌려받는 넉넉한 보상을 받게 되었지만 이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그 한 달란트마저도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습니다. 후회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 본문을 읽다보면 4가지 유형의 종들이 있음을 언뜻 눈치 채게 됩니다.
착한 종, 악한 종, 충성된 종, 게으른 종입니다.
4종류의 일꾼들은 여러 가지로 조합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있습니다. 매우 바람직한 종이고, 되고 싶은 일꾼입니다.
여기서 착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의미이고, 충성 된다는 말은 주인이 시킨 일에 성실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잘 지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사명으로 알아 그 사명을 감당하려고 바둥거리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착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착하기는 한데 게으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맞는데 게으릅니다.
게으름은 자기 사랑의 다른 표현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결국 게으름과 착함은 같이 다닐 수 없는 단어임을 알게 됩니다.
게으른 사람은 결코 착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악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악한데 충성스럽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인데 충성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충성해야 내게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충성의 출발점이 나 자신을 위한 생각에서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주인을 언제라도 배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악한 사람은 그래서 충성이 불가능합니다.
그러고 보면 악하고 충성된 사람도, 착하고 게으른 사람도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들임을 알게
됩니다. 서류상으로, 이론상으로는 존재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넷째로 악하고 게으른 종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 비유를 가만히 분석해 보면 이론적으로는 4종류의 사람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자, 착하고 게으른 자, 악하고 충성된 자. 악하고 게으른 자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만 드러납니다.
착하고 충성된 자와 악하고 게으른 자!
착하고 게으른 자는 없습니다. 그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자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악하고 충성된 자는 없습니다. 그 사람 역시 악하고 게으른 자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결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게으른 자는 결코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 오실 날은 다가오는데,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얼굴을 뵈올 날은 다가오는데...
문득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난 지금 착하고 충성된 자인가? 아니면 악하고 게으른 자인가?
많은 상을 받으면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사람인가?
아니면 바깥 어두운 데에서 슬피 울며 후회 속에 이를 갈 사람인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