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세속화, ‘소금이 맛을 잃어가는 과정’
교회세속화, ‘소금이 맛을 잃어가는 과정’
  • 정택은
  • 승인 2017.11.0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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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없어지고 있다.” 이 말에 기독교인들은 당혹스러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초대교회의 중심이었던 소아시아의 교회들이 이슬람의 침략으로 없어졌고, 한국교회의 중심이었던 북한의 교회들이 공산화로 인해 사라졌다. 이런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교회가 사라진 것은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내부적인 요인에 의해 쇠망해가고 있는 유럽교회의 모습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의 중심이자 지금도 세계교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유럽교회가 20세기를 거치면서 내적 세속화로 인해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회생을 위한 방법을 찾기도 쉽지 않다.

칼 바르트는 세속화를 소금이 맛을 잃어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하고, 맛을 잃은 소금이 땅에 버려져 짓밟히듯이, 맛을 잃은 교회는 세상에게 짓밟히는 것이 마땅하다고 탄식했다.

기독교가 종교화되고 세속화되는 처음 1단계에서 교회는 번창하고 교인도 증가한다. 그러나 세속화로 인해 거룩성을 상실하고 그 허구성이 드러나면 2단계에선 급격한 탈교회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가 복음이기 때문에 복음을 상실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상실을 의미하고, 그러면 결국 아무 능력도 실체도 없는 것이 된다. 이럴 때 그리스도는 하나의 상징이나 개념으로 전락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질 수 없다.

유럽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회복하고자 했던 복음을 상실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보다는 약소국들을 침략해 오랜 시간동안 식민통치를 자행하고 스스로 교만이 극에 달하면서 기독교신앙의 본질을 상실하게 됐다. 기독교가 유럽인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정당화하고 신성화하는 종교문화로 전락한 것이다. 그래서 디트리히 본회퍼는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시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유럽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상실했다고 울부짖었다. 그는 유럽교회가 기독교를 철저히 문화화하고 종교화했기 때문에, 기독교의 비종교화를 주장한 것이다. 종교란 일반은총이지만, 특별은총에 기초한 기독교가 종교로 전락하는 것은 복음을 포기하는 타락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한 최고의 책임은 바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데 있다. 즉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것이 교회의 최우선 과제이다. 이 복음 선포가 교회의 사명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이미 유럽에서 교회생활은 종교생활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대한 건축물과 오래 된 전통을 자랑한다 해도 세속화된 교회에 미래는 없다. 한국교회에도 세속화의 우려가 높아가고 있다. 한국교회가 철저한 자기성찰과 개혁을 수행해 가지 않는다면 유럽교회처럼 미래가 밝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높아가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보면, 중세에 예수님이 스페인의 세빌을 방문하여 대재판관인 추기경을 만나는 이야기가 있다. 추기경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겁하여 그분을 깊은 감옥에 가두고 처형하려다가 어두운 밤에 풀어주면서 다시는 교회에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들의 체제로 안정된 교회에 예수님의 개입은 대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21:33-41)를 연상시킨다. 농부는 주인이 보낸 종들과 주인의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을 차지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진멸당하는 비극적인 운명에 처하게 됐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는 교권투쟁이다. 총회뿐만 아니라 개교회로도 확산되어 서로 교회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주도권 대립이 심화되고 있고, 극한적인 투쟁과 분열을 일삼고 있다. 교회의 실제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밀려나 소외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다. 예수가 주인이 아닌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한국교회는 그리스도께 그 주권을 반환하고 모두 그 분의 충성된 손발이 되어 섬기는 공동체로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이 확립될 때 교회는 하나가 된다. 이 말은 역으로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면 파벌적인 대립과 분리가 존재하고, 파벌의 보스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보좌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의 주인이 한 분이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라야 한다. 따라서 교회에 분리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인간들의 독자적인 행위일 뿐이다. 분열된 교회는 힘이 약화되고 결국 사회로부터 무시당하고 소외당한다. 고린도교회에 파벌이 있었지만, 바울은 자기를 추종하는 파벌을 책망하며 해체할 것(고전1:13)을 요구했다. 예수님도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12:25)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한다. 주님의 가르침과 같이 교회는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 빛은 복음의 빛일 것이며, 그 소금은 진리의 소금일 것이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할 사명을 갖고 있다. 한국교회는 대부분 선교와 전도에는 많은 열정을 갖고 있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교와 전도가 이웃사랑의 부속개념 임을 인식할 때 진정한 선교가 가능해 진다. 사랑이 결여된 선교나 전도는 자기 집단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이기주의적 사업으로 전락하게 된다.

과거 한국교회의 일부는 교회성장주의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수단화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했었다. 전도도, 심방도, 예배도, 구제도 사람에 대한 인격적 관심이나 사랑보다 교회 성장의 도구로 이용해 왔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집약된다. 이웃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교회가 이웃사랑에 실패하면 모든 일에 실패하는 것이 된다. 초대 이스라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겸손하기 보다는 선민사상에 젖어 교회 외부에 있는 불신자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그들에 대한 선교적 의무를 외면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존재가치도 상실하게 된 것을 그 예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당하는 위기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그 위기 속에서 교회가 본연의 사명을 깨닫고 이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하느냐가 교회의 내일을 결정짓는다. 교회가 하나님의 간섭을 담대히 요청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부여받은 본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철저히 자각하고 이를 실천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할 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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