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
  • 정택은
  • 승인 2017.11.30 0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제문제가 개인, 국가를 넘어 전 세계적인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정치지도자를 뽑는 과정에서도 경제문제 해결능력은 그 어떤 도덕적 가치보다 유권자들의 선택을 좌우하는 최고의 기준이 되고 있다. 오늘날 경제중심, 자본 중심, 물질중심의 사고가 팽배하다보니 그 위력도 대단하다. 현대인들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현대인들의 삶에서 돈이 떨어졌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까지 여긴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기준과 태도로 경제문제에 접근해야 할까?

경제(經濟)라는 단어는 영어로 이코노미(economy)이다. 이 말은 그리스어로 오이코노미아(oikonomia)로, 오이코스(oikos, 가정)와 노모스(nomos, 경영)의 합성어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공동체인 가정을 경영하듯 구성원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경제의 원래 뜻이라면, 오늘날 우리의 경제는 이코노미와는 거리가 먼 듯하다. 헬라시대에는 경제를 나타내는 또 다른 단어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돈벌이 자체가 목적인 활동을 크레마티스티케(chrematistike)라고 규정했는데, 혼자 잘 먹고 잘 살기위해서 남에 대한 배려 없이 부를 쌓아둔다는 축재(蓄財)의 의미이다. 우리가 경제를 이코노미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은 오늘날 우리 시대는 크레마티스티케가 가리키는 정신적 탐욕을 지향하며 살고 있다.

돈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대상이다. 정신분석학의 한 이론인 대상관계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돈은 사람들에게 ‘좋은 대상’이다.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며 돈을 생각하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성취감과 자긍심을 느끼는 대상관계를 돈과 맺으면서 살고 있다. 돈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식주의 필요와 욕구를 해결해 줄뿐 아니라 여러 가지 심리적 욕구를 해결해 준다. 그래서 불신자나 신자나 가릴 것 없이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일부 사람들에게 있어서 돈은 거의 신적인 존재이다. 돈이 없으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심지어는 절망까지 한다. 모든 문제의 해결과 행복을 안겨주는 만능키로 신봉하고 있다. 맘몬(Manmon)이라는 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어 보인다.

우리는 성경에서 돈에 관한 양면적 입장을 볼 수 있다. 구약에서는 돈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다’(창13:2)고 묘사했고, 욥은 거부였으며, 솔로몬은 당대의 왕들 가운데 필적할 자가 없을 정도로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었다(왕상3:13). 잠언에서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4)면서 노동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성경에서는 부에 대한 경고도 빼놓지 않고 있다. 우리의 부의 근원에 대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8)고 기록하고 있고,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는 자’는 멸망할 것(시52:7)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부의 소유는 궁핍한 자를 돌봐야 하는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잠19:17)으로 십일조, 안식일, 희년 같은 구약의 제도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의 부가 궁극적으로 주님의 소유이며 그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역할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음을 강조하는 신약에서는 돈의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12:19)에서 물질적으로는 부유하지만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가난한 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했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16:13)고 말씀했다. 바울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6:10)고 강조했다. 이렇게 돈에 대해서 성경은 이중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참된 부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앙생활 혹은 영성생활이라는 것은 물질계와 다른 영적세계가 있음을 눈뜨고, 그 세계가 참되고 영원함을 깨닫고, 그 세계의 시민으로 자신을 훈련하며 실천해가는 삶이다. 이 물질계가 전부라고 믿고 살아가는 불신앙인들과는 삶의 동기와 방법과 목적이 전혀 달라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적세계에 눈뜨지 못하고 물질세계 안에서 성공하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힘을 끌어 쓰는데 열중해왔다. 영적세계에 혹시 눈을 뜬다 해도, 그 세계의 신비를 즐기거나 혹은 그 세계의 초월적 힘을 끌어들여 사용하는데 주로 관심을 두었다. 영적세계에 눈뜬 사람답게 새로운 삶의 동기로,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목적을 위해 살아가도록 힘쓴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또한 한국교회도 물질적인 축복을 영적인 축복과 혼동했고 물량주의, 성공제일주의, 성장주의에 치중해왔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의 노력도 많은 경우 명목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국민의 사분의 일이 기독교신자라는 통계가 있지만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보다 자신만을 위한 기복적(祈福的) 신앙을 추구했다는, 즉 영적축복을 현세의 복으로 만들려고 안간힘 썼다는 지적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돈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헌금바구니에 넣는 일부만을 하나님의 돈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시각을 가지고 계시다. 주인 되신 하나님은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돈을 포함한 모든 것을 소유하신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됨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청지기 정신이다.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소유를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이다.

성경은 “저로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라고 가르친다(잠30:8). 그렇다면 필요한 양식은 어느 정도일까? 그것은 바로 관리할 수 있는 범위내의 재물이다. 관리능력을 벗어나는 재물은 복이 아니라 화가 될 수 있다. 많은 돈을 갖고 싶다면 먼저 돈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돈을 주셨지 돈에게 인간을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맘모니즘은 인간을 돈의 노예로 종속시키고 돈을 위해서라면 하나님도, 원칙도 양심도 포기하게 만들었다. 탐욕과 무절제는 돈에 종속된 인간의 비뚤어진 자화상이다. 신앙인들은 특별히 맘모니즘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재정문제를 잘 관리하고 다스려야 할 것이다. 또한 물질관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 잡기 위한 선한영향력을 행사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