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로족 에서
욜로족 에서
  • 이구영
  • 승인 2018.02.2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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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 이삭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장자의 이름은 에서이고, 차자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에서를 성경은 맏아들로 표현하고 있고(창 27:1)
야곱을 아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창 25:26)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어서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기에 장막에 거주하며 살았습니다(창 25:27)
에서는 장자의 명분에 대한 애착이 없는 욜로족 이었습니다(창 25:32-33)
오늘의 배부름과 행복을 위해서 미래를 넘겨준 사람입니다.
You only life once!
미래에 대한 관심보다는 현재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참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의 즐거움을 위해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즉각적 자기만족이 소중하고, 충동적인 사람이지
결코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no pain, no gain!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기에 오늘을 열심히 성실히 힘들게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no gain, no pain!
미래에 얻고 싶은 것이 없고, 얻을 것 같지도 않기에 그냥 오늘 고통당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에서는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입니다. 이삭은 거부이었고, 아들 에서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습니다.
평생 의지하고 살 것 같은 든든한 배경이었습니다.
요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없다! 없다! 해도 나름대로 믿는 구석들이 조금씩은 있습니다.
내 노력 없이 받는 방법을 조금씩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젊은 시절을 살다보니 현재의 누림이 계속 이어지는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맞이하는 일로 부모와 큰 의견차이가 있었지만,
부모가 근심하는 것도 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부모 보다는 내가 더 중요하고, 미래보다는 현재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의해서 동생 야곱에게 모든 상속권을 넘겨준 것을 알긴 했지만 그것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내가 잘 살고 있고, 힘으로 얼마든지 동생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들에게 인기도 좋고, 목축업과 농사를 계속하면서 충분한 부유함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 이삭이 모든 것을 동생에게 다 물려준다고 약속하고 기도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야곱은 이미 이 집안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에서의 협박과 으름장에 미리 겁을 먹고 도망을 했습니다.
이제 에서는 거부 이삭의 넓은 땅과 많은 소유를 움켜쥐며 넉넉히 살았습니다.
따르는 사람도,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상속자인 동생 야곱의 귀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 크게 걱정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은 지금 내 것이고,
이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인 노릇하고 있는 것은 에서이었습니다.
400여명의 동지들을 이끌고 야곱을 맞으러 갔는데 그때 이미 야곱은 기가 죽어 있었고,
에서에 비해 한 없이 초라해 보이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야곱은 에서의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야곱은 신체적으로도 흠이 있어서 다리를 절고 있었습니다.
에서는 흐뭇했고 야곱을 멋있게 용서해 주고 돌아왔습니다.
감히 야곱은 에서의 지경에 발도 붙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준 땅이었지만 현재 사용자는 에서이었습니다.

욜로족 에서!
그는 오늘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내가 중요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이나 천국은 생각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참 묘한 일이 일어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됩니다.
얍복강에서 눈물로 기도하던 야곱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아닌
야곱의 편에 서셨습니다.
당당한 에서보다는 약함을 알고, 한계를 알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던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에서가 야곱을 용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조정하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용서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마음을 만지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 사람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마음을 마음대로 바꾸실 수 있는 전능자의 존재를 에서는 몰랐습니다.

나아가 참 묘한 일이 일어납니다.
창세기 36장입니다.
그렇게 멀리 떠나버렸던 야곱이 언제부터 인가 에서의 영역 근처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야곱도 넉넉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야곱의 손을 들어주시면서 전세는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오히려 야곱의 재산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욜로족 에서는 위기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약골 야곱이 주인이 되어 감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동생과 싸우는 고통을 겪으면서 미래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욜로족 에서는 그 고통을 통해 얻는 유익 보다는 오늘의 평화를 선택합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에 또 오늘의 행복을 위해 떠나갑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창 36:6-7]
“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에서의 떠남입니다.
문득 이사야 14장 24절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하셨던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욜로족 에서는 그렇게 떠나갑니다.
고통 없는 현재를 위해서 떠나갑니다.
물론 이렇게 떠나는 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기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사용하셨고, 그의 아들들을 부족장들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왠지 아쉬움은 남습니다.
동생 야곱에게 밀려나 고개를 숙이고 떠나가는 욜로족 에서!!
하나님도 부모님도 무시하고 오직 나 중심으로 살던 에서의 씁쓸한 노년을 보면서
오늘 이 시대의 욜로족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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