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청춘
아빠의 청춘
  • 김재용
  • 승인 2018.05.17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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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맞는 목회자들과 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면서 “노인 자서전”에 의견을 교류하게 되었다. 일차적인 것은 장례를 집례하다 보면 유족 대표가 고인에 대해서 회상하고 장례 예배에 오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시간이 있다. 그런데 어쩌다 특별한 말씀을 할 내용이 없어서 우물쭈물 넘어가는 가족들을 목격하곤 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서전 쓰기에 의견을 갖고 있는 목회자들과 공유해서 알아보니 비슷한 경험을 다 해보았다. 왜 그럴까? 실제로 아버지에 대해 어머니의 삶에 대해서는 자녀들이 크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도 있을 수 있으나 더 큰 원인인 부모가 자녀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전달해 줄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대화하는 방법도 몰랐다. 어떤 경우에는 훌륭한 믿음을 소유한 분들에게는 교회 성도들과 목회자가 더 많은 경험을 기억하고서 이야기 하면, 유족들이 놀라는 경우도 보았다.

늙어 감은 아름다움이다.
노인 자서전이라는 것을 작성하기 위해서 연구를 하다 보니, 또 하나의 암초를 만났다. “노인” 이라는 표현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인이라는 표현사용하지 않고 노인을 대상으로 해야 하나? 그리고 어떤 방법이 자녀들에게 부모와의 연계를 갖도록 자료 정리를 잘 할 수 있을까? 어려운 숙제였다.
노인은 퇴화와 연관되고 퇴화는 곧 죽음의 문턱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출생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출생을 맞이했다면 죽음도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 될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도전에 거부하는 골이 되고 만다. 따라서 죽음으로 가는 통로가 노인이기에 노인이라는 표현은 이제 곧 닥쳐올 죽음을 맞이하라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그리고 자서전은 어떤 것인가? 일반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성공담을 기록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자서전을 쓴다고 하면,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무슨 성공이 있겠는가 싶어 자서전을 만드는 일에는 선뜻 나서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는 공중 나는 새도 의미 없이 죽는 법이 없고 무가치한 생명이 없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의 삶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생명의 가치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 “노인 자서전”이라고 조합을 하면, 노인이라는 인생의 끝과 자서전이 갖고 있는 성공한 후일담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정리하는 듯 인상을 받는다. ‘노인 자서전’은 유언장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회고해보고, 자신의 청춘을 말하고, 유년시절을 말하고, 품었던 꿈 등을 기록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인 자서전 내지는 자서전 쓰기를 계속 하면, 자신의 청춘을 만나고 품었던 소망과 소중했던 친구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서전을 기록하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다시 보기 때문에 누군가가 평가하기 이전에 자신 스스로 중간평가의 기회를 갖게 된다. 솔직히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남은 생애에는 어떤 꿈을 이루며 살아갈 것인지? 진지하게 묻게 되고 또 준비하게 된다.
자녀 양육하고 뒷바라지 하던 아빠와 엄마에게 꿈이 있었다는 것을 자녀들이 듣고 기억할 수 있도록 대단한 것이 아니라도 기록하고 정리해서 자녀들에 남겨주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또 지금 유언장을 급하게 남기고 생을 정리해야 할 사람은 드물다. 오늘 시간이 있을 때, 메모를 남겨서 부모의 사랑을 자녀들이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한다면, 가정은 대대로 소중한 역사를 갖는 가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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