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피 헛되게 않게 일본 땅 복음화 사명 안고 나가사키 순교지 탐방 마쳐
순교자 피 헛되게 않게 일본 땅 복음화 사명 안고 나가사키 순교지 탐방 마쳐
  • 김오채
  • 승인 2023.07.07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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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만 내 죽음 의미 알아준다면 삶에 미련 없다는 콘스탄치오 선교사의 신앙고백 되새기자!

한일연합선교회(WGN-이사장 정성진 목사)가 주관하는 일본 나가사키 기독교 순교지 탐방 항공 B팀은 탐방 3일차(7.6/목) 오전에는 히라도 지역에 소재하는 ①자비에르교회 ②마츠라 사료관 ③야이자 화형장을 탐방한 후, 오후에는 오무라 지역에 소재한 ④스즈타 감옥터 ⑤처자이별바위 ⑥호쿠바루 처형장 ⑦머리 몸 무덤을 탐방하고 7.3(4)-7.7까지의 탐방일정을 모두 마쳤다.

스즈타 감옥터-세워진 십자가

►한일연합선교회(WGN)가 2005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나가사키 기독교 순교지 탐방은 옴진리교 사태 이후 종교방송 금지를 법제화 할 만큼 종교의 확산을 경계하던 일본 내에서의 기독교를 자유스럽게 언급할 수 있는 길은 나가사키에 묻혀 있던 기독교 순교의 귀중한 자산을 깨닫게 해주고, 순례 팀들의 순교지(나가사키) 방문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도시의 재정 자립도가 올라가게 함으로 기독교에 대한 경계심이 차차 약화되어 지게 하였으며, 나가사키의 기독교 박해와 250년간 숨어 지낸 크리스찬들의 신앙전승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일정부분 기여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번 순교지 탐방 시 마다 공무원들이 파견되어 교통안내 등을 통하여 탐방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음을 볼 때 순교지역의 지자체와 한일연합선교회(WGN)는 관광산업의 차원을 넘어서 신뢰와 우정의 민간외교로 성장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7.3(월)-7.7(금)간의 일본 나가사키 기독교 순교지 탐방에 참여한 순례자들은 일본 기독교역사가 이렇게 오래되었으며 기독교 박해에 따라 많은 순교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고 말하며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친 순교자의 숭고한 피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으며 우리 모두 이 순교자의 숭고한 피가 헛되지 않게 일본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며 선교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고 이러한 순교자의 신앙을 후세에 전수하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면서 기독교의 불모지로만 알았던 일본의 성지를 개발하여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 믿음의 상태를 재 점검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신 한일연합선교회에 감사를 전하였다.

▣히라도 지역 순교지

①자비에르교회

►1549년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를 알린 프란체스코 자비에르 선교사(스페인 출신)를 기념하기 위하여 1931년에 건축된 교회(성당)로, 기독교 박해와 2차 세계대전 중 공습으로 심각하게 파괴되어 1990년 자비에르 선교사가 일본에 타고 온 범선을 모티브로 재건되었다. 처음 교회건축은 대칭건축으로 설계되었으나 그 당시 건축비 200엔이 부족하여 비대칭(우측에는 좌측에 있는 탑 모양의 건축물이 없다)으로 건축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한편 이 교회는 기독교인들을 감시하는 관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가쿠레 기리시탄(그리스도인)들은 위장술로 교회 앞에 절을 배치하였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동양과 서양문화가 어우러진 히라도 지역의 랜드마크로 이국적이고 예술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다.

►성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는 스페인 출생의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선교사로 포루투갈 왕 후앙3세의 명으로 인도에 파견되었다가 1549년 일본에 기독교를 전한 최초의 선교사이다.

자비에르교회
자비에르교회-비 대칭 모습
자비에르교회-내부
자비에르교회-전경

②마츠라 사료관

►마츠라 사료관 터는 1893년 히라도의 영주였던 마츠라 타카노부(일본 외교무역을 가장 먼저 성공시킨 자)의 저택으로 1955년 10월 사이카이국립공원 지정을 전후하여 마츠라 스스무(마츠라 가의 39대 손)가 자료, 토지, 건물을 기증함으로 역사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는 1587년 6월 19일 발령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크리스천 금제의정서(추방령) 원본이 소장되어있다.

마츠라 사료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크리스천 금제의정서(추방령) 원본

③야이자 화형장

►카밀로 콘스탄치오 선교사(이탈리아 출신)는 1605년 일본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하던 중 1614년 도쿠가와 막부의 금교령에 의해 마카오로 추방되었고, 이후 1621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지만 사가와 이키츠키에서 선교 하던 중 체포되어 1622년 9월 15일(50세) 야이자 언덕에서 화형 당하였으며 그곳에 불꽃형상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가 순교하기 전 일본어와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로 전한 설교를 통해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며, 화형 당하던 중 불길에 휩싸인 채 환희에 차서 “오직 한 분 하나님만 나의 죽음의 의미를 알아주신다면 삶에 아무런 미련 없이 기꺼이 운명을 바칠 수 있다고 고백하며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고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야이자 화형장 기념공원에는 시청에서 탐방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태극기와 일장기를 나란히 계양하여 주었으며 탐방 팀은 순교자 “카밀로 콘스탄치오 선교사”를 추모하면서 찬양과 기도로 일본 땅의 복음화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번 탐방에 참여한 한 집사님은 일본에 이렇게 많은 순교자가 있는 줄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몰랐다고 말하며 순교지를 잘 보존하고 탐방하는 분들이 찾아오도록 하여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다고 말하고, 이를 후대에도 잘 알려 신앙이 계속 계승되도록 해야겠고 카밀로 콘스탄치오 선교사의 믿음의 본을 받아 더욱 주님만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도록 열심을 다하겠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야이자 화형장 기념비
야이자 화형장 기념공원-태극기와 일장기 
기도
기도

▣오무라 순교지

①스즈타 감옥

►스즈타 감옥은 나가사키의 관리에 의해 체포된 외국인 선교사 등이 수감되었던 곳으로 지명을 따 “미야자키”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전국시대(15세기 후반 16세기 후반) 말기에 영주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가 기독교 다이묘(지방 영주)가 되었고 지역과 모두가 기독교인이 되는 등 오무라 영지에서는 기독교가 크게 융성했다. 하지만 에도시대(1603-1868)로 들어서자 기독교 금지가 엄격해지고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국외 추방명령이 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은밀하게 일본에 남아 포교활동을 계속한 선교사들이 있었지만 막부의 엄한 단속에 따라 많은 선교사들이 붙잡혔습니다. 이 감옥에는 겐나 3년(1617년) 7월부터 겐나 8년(1622년) 9월까지의 5년간 나가사키 관청에 붙잡힌 선교사와 신도 35명이 갇혔다. 선교사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매우 좁은 간격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새장 같은 감옥으로서 길이 5.3m, 넓이 3.5m인 협소한 구조를 지닌 이 공간에 많게는 33명의 사람들이 수감되고 있었기 때문에 눕지 못하는 것은 물론, 운신조차 자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감옥 주변에는 2중으로 울타리가 설치되었고, 문에는 이중으로 열쇠가 달려 있었다고 한다. 이 감옥에 갇혀있던 사람들 중 3명은 옥중에서 숨졌으며, 스피라노 신부 등 24명은 나가사키 니시자카에서 순교했다. 이를 “겐나의 대순교”라고 부르며, 프랑코 신부 등 8명은 오무라의 호쿠바루에서 순교했다(현지 감옥 터 표지판의 내용), 스즈타 감옥 터에는 한일연합선교회의 요청으로 십자가 세워졌다.

►스즈타 감옥터를 탐방한 순례자들은 “후미에 제도”(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기 위하여 고안한 제도로 에도막부는 매년 정초가 되면 나무나 금속제의 예수 상을 밟게 강요했고 사람들은 예수 상을 밟고 지나가거나 침을 뱉거나 욕을 해야 했다. 머뭇거리는 사람은 체포되어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를 시연해보면서 그 당시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내가 그 당시에 살았다면 나는 과연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을까!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육적인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예수님 얼굴을 밟으며 지나가야 하는 심정과 영적인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못이 박힌 목판을 지나가 그 후 갖은 고문을 당하여야 하는 심정의 모습들이 교차하기도 하였다. 예수상을 밟고 지나가려고 하는 성도는 밤새껏 발을 깨끗이 씻고 그 물을 모두 마시고 후미에 제도에 임하였다는 이야기에서 영과 육의 어느 생명을 지켜야 하는지 놓고 고민하는 모습이 상상되어 가슴이 미어짐을 느꼈다.

►한 순례자는 살기 위해 예수님을 배반해야 했던 그 당시 신앙의 선배들의 고초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순교자들의 흘린 피가 헛되지 않도록 이 땅에 영생의 복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말하였다.

스즈타 감옥 터
스즈타 감옥터에 한일연합선교회가 세운 십자가
후미에 제도 시연
후미에 제도 시연

②처자이별바위

►감옥에서 참수형을 선고받고 처자들과 이별하는 표지석으로 가족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애통하는 심정을 가눌 길 없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기에 지금까지 처자이별바위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한다. 그러나 처자이별바위가 동네의 공동묘지의 묘비와 함께 있어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다.

처자이별바위

③호쿠바루 순교지

►오무라 영내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순교지로 참수형이 결정된 406명 중 131명이 1658.7.7. 호쿠바루 처형장에서 순교했다. 순교자들은 형장에 도착해 엄중한 조사를 받은 후, 4열로 줄을 지어 무릎을 끊은 채 차례로 참수 당하였는데 그 어느 누구도 한마디의 신음도 내지 않고 묵묵히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호쿠바루 순교지의 순교 탑 좌편에는 처형당한 131명의 순교자 중 조선인 13명의 복자를 기념하는 기념표지석이 한 쪽 구석에 작게 만들어져 있어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이 마음이 아팠다.

호쿠바루 순교지 탑
기도
호쿠바루 순교지
조선인 13분 순교기념비

④머리와 몸 무덤

►호쿠바루 처형장에서 순교한 131명의 시신 중 머리와 몸을 따로 매장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부활이 실제 일어날까 두려워 일어난 현상으로 그리스도교를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교라고 치부하면서 부활신앙이 두려워하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또한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처참하게 참수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머리를 매장하기 전 소금에 절여 옥문에 20일간 전시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목이 잘린 몸은 사쿠라바바의 인적이 드문 대나무 숲 속에 두 개의 구덩이를 파고 매장하였으나 매장 후 3일 만에 몸을 다시 파내어 오무라만에 버렸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몸 무덤
머리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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